참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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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의 개요(槪要)
(1) 참선은 열린 마음(開心)의 지향
참선은 곧 '본마음·참 나'를 밝히는 작업이다. 본마음·참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서도 물든 일이 없으며, 완전하다고 한다. 참선은 이러한 본마음·참 나에 대한 확고한 인식 내지는 신심(信心)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올바른 참선의 선결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좌선의 자세나 모습 혹은 생활선의 취지 등이 유사한 듯 보인다 해도 불교의 참선과 여타 종교의 명상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적(史的)인 관점에서 볼 때, 참선 대중화의 기반을 닦은 이는 육조혜능(638~713)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스님은 결코 몸의 좌선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으로 화두 드는 것도 주창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볼 것'見性(견성)'을 강조하였을 따름이었다.
선지식의 지도로써 단박에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거나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돌이켜 확인하면 되는 까닭에 '단박(頓)'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장소에서 특이한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행할 수 있는 열린 참선이어야만 한다. 본마음·참 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참선이란 일체의 형식과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선지식의 지도와 자신의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고나 할까, 하지만 그 선지식조차도 다분히 자신의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있다. 마음이 열려있는 이에게는 자연 그대로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 아님이 없을 것이나,
마음이 닫힌 사람 앞에는 비록 불·보살과 달마대사가 당장 나타난다 해도 크게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문은 열기 위해서 닫는 것이다. 이제 비록 참선이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수행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원칙일 뿐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한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곧 몸의 좌선(坐禪)이며 마음의 화두 챙김(看話)인 것이다.
(2) 참선의 기본방법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
좌선의 자세에 관해서는 종색스님의 《좌선의(坐禪儀)》를 참고하면 된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점은 허리를 바르게 펴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호흡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으며, 복식호흡을 권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스스로가 오랫동안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람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 생각의 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앉아 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自性)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분별(思量分別)이나 지견(知見)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 만 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3) 참선은 바로 지금(當下)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다만 좌선할 뿐, 여타의 사념이나 동작이 일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 '영원'을 희구한다. 하지만 그 '영원'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의 이 순간들이 '영원'인 것이 아닐까.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일 따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을 떠나서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로서 절대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 지금'을 떠나서 마음의 평화나 육체적 안식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 편안함을 성취할 수 없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 성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후회, 설움 등 일체를 놓아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걱정 따위도 떨쳐 버린 채, 오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만 좌선에 몰두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연습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러한 마음가짐이 숙달되어야 비로소 생활선(生活禪)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좌선할 뿐', 이러한 습관이 어느 정도 익어가야만 비로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 우면 잠잘 따름이라는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이 와 닿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밥 먹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잠잘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대화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일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살아갈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죽을 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좌선(坐禪)은 연습(練習)이요, 생활(生活)이 실수(實修)라고 하는 것이다. 좌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시간과 공간인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할 뿐'이라고 하는 '뿐'연습이다. 이렇게 연습해서 마침내 몸도 잊은 듯 마음도 잊은 듯(身心脫落)한 상태에서 이르게 되면, 점차 이러한 경지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게 되어,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백퍼센트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 것(禪不屬修)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수행(修行)이라는 원인을 통해서 깨달음(覺)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상식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다. 참다운 도(道)는 상식에 기반 하면서도 상식을 초월한다.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禪不屬修)다. 닦아서 터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졌으니 다시 부서질 것이다. 즉 인과(因果)에 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마조(馬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자성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자성(自性) 즉 본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이라고 해서 취한다거나 악(惡)이라 해서 버린다거나 공(空)을 관찰해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공연히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한 생각 망념(妄念)이 삼계 생사(三界生死)의 근본이니,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으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의 위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은 오직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애면 될 따름이다. 즉 도는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평상심(平常心)이 도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이란 평상시의 마음을 뜻한다.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덧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계에 부딪쳐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인 것이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처럼 안심(安心)을 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 무엇도 더 이상 멀리 찾을 것이 없으며, 완벽해지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해 나가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본마음·참 나에는 이미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에 입각한 수행이란 결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며, 본마음·참 나를 지켜나갈 따름이다. 이것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상태를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날 때 얼른 이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때 유용한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5) 참선은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
닦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거든, 그 생각을 얼른 화두로 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한 군데에 초점(Focus)을 맞추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쉽다. 가령 동일한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가 지속해 날지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쏟다보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TV를 볼 때, 어느 한 채널에서 공포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하자. 그때에 공포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차라리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택함으로써 관심을 바꾸는 것이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에 입각해서, 화두를 통해 무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이다. 이것은 집중형 간화(集中形 看話)와는 다르다. 집중형 간화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화두에 몰두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삼매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다. 무심형 간화는 이와 달리 애당초 무심 상태로 출발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화두를 챙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무심이란 아무런 잡념이 없다는 뜻이다. 곧 '무의식적 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좌선을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저 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한 무심상태가 흔들릴 때에 얼른 화두를 챙기는 것이 무심형 간화이다.
역순경계(逆順境界)가 나타나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는 순간 무분별심한 화두를 챙김으로써 본마음·참 나 즉 평상심으로 돌이킬 따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순경계는 끊임없이 외부나 혹은 내심에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지속적으로 화두를 챙겨나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평상심으로서의 무심을 우선적인 전제로 하고 있는 점에서 집중형 간화와는 입각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중형 간화는 상당한 끈기와 집중을 요하는데다가, 의도적 방법으로 인하여 자칫하면 상기병을 유발시킬 수 있다. 아울러 미래지향적 태도가 생겨나기 쉽다. 그래서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짧은 시일 안에 공부를 마쳐보겠다고 욕심내어 달려들었다가 중도하차하기 쉽다.
그렇지만 무심형 간화는 철저히 현재 지향적이다. 자성청정심 즉 평상심이 도(道)임을 굳게 믿고, 현재에 몰두하면서 다만 흔들릴 때마다 화두를 챙겨 본 마음을 회복하면 그 뿐이다. 이때의 화두는 마치 관운장의 청룡도와 같다. 청룡도는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과 맞닥뜨렸을 때 휘둘러야 유용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무심형 간화는 실생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실생활에의 몰두에 참다운 가치가 부여되고, 나아가 주위와의 부딪힘 자체가 유용한 수행기회가 되어 진다. 그럼으로써 좌선은 다만 연습에 불과할 뿐이요, 생활이 실전이 됨으로써, 우주가 수련장이고 만나는 이마다 선지식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닦을 수 있는 열린 참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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