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 ---- 통일신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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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융성기에 귀족사회에서 가장 두터운 존경을 받은 것은 화엄종이었다 신라의 화엄종을 개종한 의상(義湘)은 중국 화엄종의 수도자인 지엄(智嚴)의 수제자였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이를 중심 도량으로 하여 화엄학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밑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화엄의 사상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융사상이며 일심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지배적인 귀족 사회에서 환영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여러 종파의 대립의식을 배격하였다. 원효는 당시의 고승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입당 유학을 하지 않았으나 학승으로서의 위대함은 당에서조차 존경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법상종 계통의 사상을 주로 연구하였지만 불교 연구의 범위가 지극히 넓어서 많은 경전에 조예가 깊었다.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아미타경) (금강삼매경) <대승기신론> 동의 여러 경론에 주(註). 소(蔬)를 달았다. 그는 일경일론(一經一論)으로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삼지 않았고, 여러 종파의 모순상쟁이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그의 저술 <십문화생론(十門和諍論)>은 이러한 그의 사상을 담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는 후일에 화쟁국사라고 추서되기에 이르렀다. 원효의 사상은 통일신라의 전제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사상적으로 융화시키려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와 같은 귀족불교와 함께 주로 민중에게 환영을 받은 정토교가 통일기에 크게 유행했다는 점이 또한 주목된다. 이 정토교의 내용은 5교와는 달리 염불만으로 사후에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현실 부정적이고 대중적인 이 정토교는 하층사회에서 큰 환영을 받았으며 신라불교의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토교는 무식한 자라도 믿을 수 있는 민중의 불교였다. 불교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을 외면된다. 그러면 아미타불이 산다는 서방정토, 즉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지극히 단순한 신앙 중심의 교리를 가진 것이 정토교였다. 정토교가 민중불교인 것은 그것이 또 억압받는 자에게 환영받는 불교였기 때문이다. 정토교는 현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고해라 하고 내세인 극락에 왕생할 것을 소원하는 것이다. 이 정토교가 일세를 풍미하여 허다한 민중들이 현세를 등지고 입산하였으며, 육신의 산몸으로 하늘을 날아서 서방정토로 왕생했다는 설화까지 나오게 되었다. 전제주의하에서 사회적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서 나타난 민중의 염세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겠다. 정토교의 유행은 산라불교계의 큰 변화인데 정토교를 널리 전파한 것은 원효였다. 원효는 학승으로서도 위대하였지만 파계한 뒤에는 방방곡곡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범부왕생의 정토신앙을 전파한 유행승(遊行僧)으로서 오히려 더 위대하였다. 그의 정토사상은 '유심안락도(游心安樂道)'에 잘 나타나 있는데 거기서 그는 "정토의 깊은 뜻은 본래 범부를 위한 것이지 보살을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전도 이후에 신라인의 십중팔구가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민중불교의 대 전도자였음은 분명하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은 선종의 유행이었다. 선종은 경전 연구에 치중하는 교종과는 달리 견성오도(見性悟道)에 의한 심성의 도야에 주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선이라고 하는 조용히 앉아서 사색하는 방법을 통하여 얻어지는 심적 체험으로써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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