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 ----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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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고구려 불교 전래
삼국시대에 전개된 불교는 우리민족의 고대 신앙이나 고유 풍속 등 종래의 기존 문화와 잘 융화하면서 휼륭한 민족문화로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였다.
372년(소수림왕 2) 여름인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 부견왕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스님으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 화상이 고구려로 왔으며,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375), 초문사(肖門寺, 省門寺라고도 함)를 지어 순도스님을 머물도록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화상을 머물게 하였다. 이 두 사찰이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소수림왕은 즉위와 동시에 율령을 공포하고 문물제도의 확립에 진력하였으며, 대학을 세워 왕이 직접 학사에서 도를 강론하였고, 구복호국의 사상으로서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다. 순도가 주석하였던 성문사가 흥국사로, 아도가 머물렀던 사찰이 흥복사라 개명된 것으로 보아 소수림왕의 구복호국 정신의 확립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국사종묘(國社宗廟)가 각 지방에 세워지고 불교의 오묘한 진리도 널리 전파되어 불교가 인간에게 복을 주고 국가에 번영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은 \'불교를 믿고 복을 구하도록 위민정치의 일환으로 또는 강력한 통치를 위한 사상적 통일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19대 광개토왕은 즉위 2년(392)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세워 불교교화 활동의 범위를 넓혀 갔고, 또한 고승들은 구법과 전교 활동을 위하여 나라 밖에까지 나아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웃 중국에 유학하여 구법 활동을 하기도 하고, 중국 불교인을 가르친 훌륭한 고승도 많았다. 특히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은 고구려의 요동 땅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용수(龍樹)의 중관불교를 체계화시켜 중국에 삼론종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승랑은 섭산 서하사(捿霞寺)를 중심으로 많은 학인을 일깨우고 교학을 떨쳤기 때문에 그를 섭산 대사. 섭령 대사라고 하였으며 랑법사. 랑대사라고도 하였다. 삼론학(三論學; 中論 . 百論 . 十二問論)은 그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었으며,그 뒤 수나라의 고승 길장(吉藏,549~623)에 의하여 삼론종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혜관(惠灌)은 길장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서 일본으로 건너가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가장 먼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나라는 백제였지만 고구려 역시 많은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혜편(惠便)은 선신(善信)·선장(禪藏)·혜선(惠善) 등 일본 최초의 세 비구니를 배출하였고, 혜자(惠慈)는 유명한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태자를 가르치면서 불교를 전교하였다. 또한 영양왕(纓陽王) 때 일본에 간 담징(曇徵)은 오경에 통달하였으며, 또 채색과종이, 붓 만드는 법, 맷돌 쓰는 법 등을 가르쳐서 일본인들의 생활향상과 문화발진에 크게 이바지함은 물론,나라(柰良)의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한편,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에 귀화하여 승통이 되어 신라불교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7대 영류왕(滎留王,618~642) 때에 들어온 도교의 일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에 의해 고구려의 불교문화는 차츰 위축되었다. 이에, 보덕(普德) 은 국가사상이며 문화의 주축이 되는 불교를 갑자기 핍박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을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보장왕은 듣지 않았다. 보덕이 고구려를 떠난 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불교를 바르게 신봉하고 불교문화를 일으켜 강성했던 고구려가 불교를 버린 보장왕 때에 망한 것으로 보아 불교문화는 바로 고구려를 유지시킨 생명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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