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 ---- 신라 불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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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불교 (1) 초기 불교 신라는 삼국등 지리적인 조건이 가장 불리하여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 어려웠으며 불교 수용 또한 고구려나 백제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라의 불교 전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는데 이를 시대순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해동고승전》에서 인용한 <박인량수이전 朴寅亮殊異傳>과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아도본비 我道本碑>에 있는 설로서, 제13태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전래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堀摩)와 알게 되어 아도를 낳았다. 어린 시절을 어머니 밑에서 보낸 아도는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뒤, 현창화상(玄彰和尙) 밑에서 공부하고 16세에 귀국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말씀을 쫓아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머물렀던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는 신라 서라벌로 오게 되는데, 그때가 미추왕 2년인 263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스님이 신라인들에게 불교를 알리려 하자 계림(鷄林) 사람들은 스님을 죽이려 하였고, 하는 수 없이 아도스님은 일선현(一善縣)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공주(公主)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고 불교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위협을 느껴 모례의 집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 鷄木雜典>에 기록된 것을 《삼국사기》·《해동고숭전》· 《삼국유사》 등에서는 인용한 것으로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러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즉, 묵호자가 모례의 집에 숨어 지내며 불교를 전파할 때를 기다리던 어느 날, 양(梁)나라에서 신라 왕실로 향을 보내왔으나, 그 이름과 쓰는 법을 알 수가 없었다. 왕은 신하에게 그것을 알아오도록 명하였고, 전국을 다니며 수소문하던 신하는 묵호자를 만나 명쾌한 해답을 엿들을 수 있었다. "이는 향이라는 것인데 불을 사르면 향기가 몹시 품기며,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성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 그때 왕녀(王女)의 병이 대단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으므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며 기도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그러나 아직은 신라 땅에 불법을 전할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왕실에 은혜를 베푼 묵호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번째 설은 <삼국유사> · <삼국사기) 등에서 묵호자 이야기에 이어 기록되어 있다.제21대 소지왕(479-500) 때 아도(阿道)화상이 시자(侍者) 3인을 데리고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데 아도는 묵호자와 모습이 매우 비슷하였으며, 아도가 모례의 집에 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다가 병 없이 돌아간 뒤, 그의 시자들이 남아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자 다수의 신봉자가 생겼다고 한다. 네번째 설은 법흥왕 14년(527) 아도가 와서 불교를 퍼뜨렸다는 내용이다. 이는 <해동고승전)에서 인용한 옛 기록을 따른 것으로 당시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으로 오자, 모례는 크게 놀라며 "일전에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坵琵)가 왔다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도를 눈에 띄지 않게 집안의 밀실(密室)로 모셨다. 때마침 신라에 온 외국 사신은 향을 가져왔고, 아도가 그 용도를 알아맞힌 것을 계기로 대궐로 들어가자 외국의 사신은 아도스님께 예배(禮拜)를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법흥왕은 부처님과 승려를 공경해야 함을 깨닫고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기록을 통하여 신라불교 전래에 따른 어려움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신라땅에 불교를 전하고자 포교승들이 끊임없이 숨어들어 암암리에 포교하였고, 그 지역이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지역인 일선군(一善郡) 방면이었으며, 특히 모례의 집이 포교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의 네 가지 설 중에서 네번째의 법흥왕 불교 공인설은 학계에서 채택이 되지 않고 있다. 신라불교의 수용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포교승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신라 왕실의 불교공인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씨족 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법흥왕 대에 이르러 씨족적인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王室派)들은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법흥왕 7년인 520년, 왕은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짓고, 527년의 이차돈 순교(殉敎)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 공인을 선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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